步의 報

걸음의 갚음
목이 마르고 다리가 아픈 것, 얼굴이 까매지고 글을 쓰지 못한채로 지쳐 잠드는것. 그럼에도 걷는것은 걸음이 갚아주듯 나의 것으로 남겨지는 사건들 때문이다.

나는 매일 이름을 써 붙이듯 겪음을 안고 잠에 든다, 폐의 숨같은 이 안타까운 파일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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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 오지노라, 오지게 돌아다니다 – #1 대도시(大都市)

루프

도쿄 길거리의 라바콘문 앞에 가시가 달려 방 안에 꼼짝없이 며칠을 갇혀있었던 때가 있다. 얌전히 갇혀있으면 가시를 볼 필요도, 가시에 찔릴 필요도 없어서 나는 유령처럼 뒤꿈치를 들고 집 안을 떠다녔다. 선을 그리듯 발이 닿았던 곳으로만 걸어다니며 무게는 소리다, 무게는 소리다. 더 가벼워지기만을 바라던 때가 있다.

꿈에는 시간이 없다, 나의 마음만 있을뿐. 창문 너머 하늘이 그러했다. 바람이 불거나 해가 움직이는 것도 오해같았다.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있던 그 때의 나는 시간을 잃고 꿈을 꾸듯 깨어있었다, 사지를 입 안 가득 문 채.

아픔을 딛고 더 강해진다는 건 불가능해, 수술자국을 손으로 쓸어보며 생각한다.자신의 손을 가져다대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무거운데. 다만 아픔은 겁을주고 도망치게 만든다. 더 빨리 도망쳐야해! 다시는 그 곳에 갇히고싶지 않아, 조심해야해! 두려움에 떨며 다리를 더 빨리 움직이도록 하는것이다. 할머니가 된다면 그렇게 계속 도망치다보니 몇 십년을 살아왔다고 아주 나중에,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초여름

여름 도쿄의 거리계절의 바뀜이란 몇 주간 요동치는 날씨 그래프를 거쳐 이루어지는것으로, 봄에서 여름이 되어가는 동안은 어느날은 비가 쏟아지고 어느날은 추우며 어느날은 뜨겁고 청명하다. 하라주쿠까지 걸어갔던 날의 저녁은 마치 7월의 그것처럼 길고 포근했다.

일과를 마치고 사람들이 집으로 모여드는 시간, 주택가의 거리에는 아이를 마중나온 어머니들과 구두를 벗고 발을 쉬이고싶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일상은 내 것이 되었을때만 지루하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지도 않고 음악을 듣지도 않고 거리를 구경하며 느긋하게 걸었다.

포장마차

도쿄 낮의 포장마차막 서울에 상경했을때, 나는 고향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모든 일들을 경험해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셔보는 것이었다. 길거리 음식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렇게 가보고싶어했을까? TV속 가난한 주인공들이 오뎅탕에 소주 한잔 하는 게 맛있어보였나? 아니면 고된 하루를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아 술로 밤을 늘이는 그 발버둥이 멋있어 보였나?

강변북로를 걷는 여자

도쿄 차도 위의 초록색 택시도로를 잘 걷는다. 하계동에서 월계동까지 걸었고 한옥마을에서 전북대까지도 걸었고 광흥창에서 연남동까지도 걸었다. 주로 차가 다니는 도로에는 인도가 좁아 위험하지만 반대로 북적이지도 않아 걷기에 좋다.

예전에 누군가 왜 그렇게 걸어다니냐 물었다. 무슨말인가 싶어 되물었더니 그렇게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처량해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구나 싶어 웃었다. 아마 노래 ‘강변북로를 걷는 여자’도 그런 발상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이겠지? 저 사람은 왜 강변북로를 걷는걸까, 무언가 고민이 있기때문에 저렇게 혼자 터덜터덜 걷는게 아닐까- 하는 그런.

차가 달리는 도쿄 거리가끔은 내가 아무 생각없이 하는 행동에 예상치 못한 코멘트를 받을때가 있다. 버릇이나 습관, 생활 패턴같은 것들에서.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그랬나?’ 하는 생각에 쑥쓰러워 웃음이 나기도 하고 새삼스레 ‘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타인이구나’ 하고 문득 관계와 인연따위의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나는 나에게 돌아오는 그 반응들이 좋다. 그래서 더욱 하고싶은대로 움직이는것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반드시 긍정적이지 않아도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것이라도 마치 그 반응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아마추어

하라주쿠 디자인 페스타 갤러리하라주쿠의 ‘디자인 페스타 갤러리’는 예술가, 소상공인, 지역주민등에게 조그만 전시공간을 임대해주는 곳이다. 내부는 마치 숙박업소나 작은 아파트처럼 101호, 102호 처럼 방으로 나뉘어 있어 각 방마다 서로 다른 작가의 전시가 진행된다. 농산물의 사진을 전시해 놓은 방도 있었고, 구체관절인형과 그에 관한 소품들을 전시해놓은 방이나, 판매하는 그림이나 잡화를 전시 해 놓은 방도 있었다.

갤러리는 두 개의 동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좁은 통로를 지나 조금 더 넓어보이는2층 건물로 이동하니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하라주쿠 디자인 페스타 갤러리 전시 작품알고보니 근방의 사진학교 학생들의 졸업작품 전시회였다. 근처에 서 계시던 분께 사진을 찍어도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허락하시며 자신의 학생이라고 이 작품의 작가분을 불러 소개시켜주셨다. 미소가 무척 밝은 여자분이셨는데, 사진이 마음에 든다고 했더니 인스타그램 주소가 적힌 명함을 받을 수 있었다.

대략 스무명 정도의 졸업생들의 작품을 모두 감상하고 돌아나오며 ‘아마추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여태까지 왜 아마추어라는 단어가 불행한 단어인줄 알았을까, 이렇게 다들 즐거워보이는걸.

데우스 엑스 마키나

메이지 신궁 근처 건물 지하의 바에서 만난 디제이메이지 신궁 옆을 지나서 갤러리를 향해 걸어가는 중 눈에 띈 건물. 1층은 카페, 2층은 편집샵, 지하에는 바가 있었다. 우선 이름이 멋있어서 호기심에 지하의 바로 들어가보았다. 무슨 파티라도 있는걸까, 20평 남짓의 넓지 않은 공간에 몇몇 사람들이 서 있었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조그만 디제이 세트에서 어떤이가 공연을 준비하고있었다. 한쪽 벽에 진열된 서핑보드를 보며 어쩐지 즐거운 음악이 나올 것 같아 진토닉을 한 잔 마시며 기다렸다.

검고 긴 머리의 일본인 DJ는 80년대의 펑크와 디스코, 시티팝과 소울을 좋아하는 듯 했다. 본격적인 디제잉이라기보다는 거의 믹스테잎을 틀어주는 느낌이었지만 그 취향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 다음의 DJ가 등장하기전까지 어깨를 들썩거리며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잠시 대화를 할 수있었는데 취미로 꽤 오랫동안 디제잉을 하고있으며, 오늘이 처음 공연이었다고 했다. 나는 짧은 일본어로 축하를 전하고 그는 나의 여행에 행운을 빌어주었다.

도쿄 바 입구군침이 흐를만큼 마음에 쏙 드는 재생목록을 발견하는 건 좀처럼 쉽지 않은일이다. 그래서 나는 기분이 꽤 좋아졌다. 호기심과 질투, 그리고 동시에 감탄이 일렁이며 자꾸 웃음이 나게 만들었다. 음악이란 얼마나 좋은것인가! 여행이란 얼마나 좋은것인가! 오늘 이 곳에 와서 얼마나 즐거운가!

음악은 절대적이다. 우연에 우연이 나를 이끌어 어떤 곳으로 이끌어주려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것은 기술의 유무나 자격증의 유무같은것에 달려있는것이 아니다. 그저 생각이 들어 그것을 실천했을때 좋은것이 나올 수도 있는것이다. 할 수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이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체 누구를 미워하기 위한 방식인가. 나는 미워하고 미워하던 마음으로부터 풀려난 것 같아- 걸음과 걸음 사이에 생각했다.

스시유

도쿄 스시 맛집 스시유 간판돌아오는 길에 은은한 회 냄새를 풍기며 서 있던 식당. 생선냄새도 아니고 회 냄새라니,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정말이다. 비릿한 생선냄새가 아니라 싱싱한 회를 입 안에 넣었을때 느껴지는 그 생선의 살 냄새가 열린 대문 사이로 정원을 건너 진동을 하고 있었다.

눈이 번쩍 뜨여 검색을 해보려 했지만 글자를 못 읽어 그 자리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구글맵을 뒤져 찾아낸 결과 굉장한 평점을 가지고 있는 맛집이었다. 이 무슨 미스터초밥왕같은 에피소드냐!

돌아가는 길

도쿄의 조용한 밤 거리

마침 아무도 없던 조용한 골목길.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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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오지노라상

허비는 행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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