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거리는 시간을 잡아먹는다. 멀리 가는 것은 정성이다. 쉽지 않다. 쏟아야 하는 그 정성이 무서워서 포기하는 일도 많다.

가까이 있는 것만 예뻐하면서 살 수도 있지만 때로는 동하는 마음을 등불 삼아 그를 따라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 적어도 글이라도 쓰고 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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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시마/가마쿠라 패스

시부야에서 가마쿠라도쿄에서 한 시간여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가마쿠라(鎌倉)는 조그마한 섬인 에노시마(江の島)와 더불어 대표적인 도쿄 근교의 관광/휴양지이다. 바다에 인접한 조용한 마을인 가마쿠라는 그 경치가 아름다워 영화나 드라마 등 다수의 영상예술의 배경지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해수욕이나 서핑을 즐길 것도 아니고 그저 바닷가를 걷고싶었던 나는 그 수많은 감독들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괜히 거기서 찍었겠어? 인터넷에서 후기를 찾아보고 길을 나섰다. 복장은 간편하게, 포켓 와이파이 배터리는 빵빵하게.

후지사와역으로 가는 에노덴 선신주쿠역에서 에노시마/가마쿠라 패스를 구입했다. 패스에는 에노시마가 행정구역상 속해있는 ‘후지사와 시’의 후지사와 역까지 왕복할 수 있는 승차권과 가마쿠라와 에노시마를 잇는 작은 전철인 ‘에노덴 선’을 무제한으로 타고 내릴 수 있는 승차권이 포함되어 있다. (1450엔)

승강장에 내려왔는데 전광판을 보아도 잘 이해가 안 돼서 옆의 승객에게 가마쿠라까지 가는 법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일본의 기차 어플을 통해 나에게 어디에서 열차를 환승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친절한 사람!

카타세 히가시하마

여행자들이 많은 일본 카타세 히가시하마구름이 흘러가는 대로 하늘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는 그런 날씨였다. 맑은 날 오면 무척 아름다울 거야, 진한 옥색의 물빛이 말하는 듯했다.

카타세히가시하마(片瀬東浜-얕은 물의 동쪽 모래사장)는 에노시마 역에서 에노시마 섬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넓게 자리하고 있다.

해변가에는 이른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과 서퍼,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평일 오후의 무척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나는 모래사장을 둘러싼 계단에 앉아 잠시 그것을 구경했다.

에노시마 역에서 섬까지는 도로로 연결되어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섬에 들어가 구경하는 것 같았다. 나도 관광안내소에서 섬의 관광 안내 책자를 가져와 훑어보았지만 별로 흥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보다 바닷가를 걷고 싶어.’ 가마쿠라 쪽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소나기

걸어서 가마쿠라 여행하는 길 소나기가 내렸다모래사장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한두 방울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 도로 위에 섰을 때는 이미 장대비가 되어 해변의 사람들을 모두 몰아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어느 건물의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 소나기를 맞는 건 얼마 만이었는지! 가방과 웃옷이 축축해질 정도로 젖었지만 왠지 한바탕 웃고 싶었다.

비가 잦아들자 사람들이 하나둘 처마를 떠나갔다. 바쁜 일 없는 나는 조금 더 기다리다가 출발했다.

가마쿠라 여행길 해안가하늘은 금방 개었다. 세수를 한 듯 멀끔해졌다. 씻느라 물이 튄 것처럼 땅 위의 것들만 흠뻑 젖었다. 비 온 후가 으레 그렇듯 공기가 깨끗해진 것처럼 색이 선명해졌다. 인적이 드문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지도 어플로 확인해보니 가마쿠라까지 걷는 것은 약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 듯했다. 기세 좋게 ‘한 시간 반? 그 정도는 걷지 뭐.’라고 생각했다가 큰코다쳤다. 오지 노라(大路野良), 이름 따라 대로변에서 세상 등 질 뻔했다.

가마쿠라로 향하는 대로지금 와서는 ‘아, 자전거를 타고 갔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도로가 높고 아래쪽이 모래사장이어서 자전거를 타고 보면 아마(모래사장은 보이지 않고 멀리 수평선과 하늘만 보여) 바다 위를 달리는 것 같아 보일 것이다.

*참고로 오지 노라가 세상 등질 뻔한 이유는 ‘목은 마른 데 가도 가도 편의점은 안 보이고 그늘도 없어서 땀 뻘뻘 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는데 괜히 언덕은 올라가지고….’였다고 한다. 하! 하!

행인

가마쿠라 고등학교 슬램덩크 건널목걷다 보니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이 있어서 ‘아, 여기가 거기구나.’했다. 가마쿠라 고등학교 앞에는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의 오프닝 영상에 나오는 건널목이 있다. (강백호가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서 있다가 건너편의 소연이와 인사하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이 근처의 핫스폿이라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실제로 보니 정말 예쁜 건널목이었다. 왜 일부러 만화에 그려 넣었는지 납득이 갈 만큼. 사진을 제대로 못 찍은 것이 아쉽다. 한두 시간 정도만 기다렸어도 찍을 수 있었을 텐데.

가마쿠라 고등학교 근처에서 만난 개나는 건널목 왼편으로 난 언덕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따라 담장 높은 주택들이 늘어 져있었다.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높은 데 올라보고 싶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덕은 경사가 꽤 가팔랐다. 인적 드문 한낮의 주택가를 수상한 인간이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 다닌다고 누가 신고라도 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조용-한 동네였다. 나는 어디? 여긴 누구?

가마쿠라 언덕에서 바라본 해변끝끝내 가장 높은 데까지 올라 내려다보니 경치가 끝내줬다. 이런 데 집 짓고 살면 정말 마음이 착해질 것 같아- 허리에 손을 얹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도롯가의 가파른 비탈을 따라 제멋대로 자란 풀과 덩굴들이 내뿜은 거친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귀를 기울이면 파도 소리가 들릴 것 같아.’ 승용차와 우체국 오토바이가 지나간 것을 제외하면 사람을 마주칠 일도 소리를 들을 일도 없었다. 그래서 어느 집 앞을 지날 때, 낮은 울타리 너머 정원에 물을 주고 계신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을 때 깜짝 놀랐다. 우리는 서로 놀란 듯 머쓱하게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가마쿠라

번화한 가마쿠라 역 앞시치리가하마 역(七里ヶ浜駅)까지 걸어와서 가마쿠라행 에노덴을 탔다. 마침 하교 시간이었는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언제부턴가 학생들을 보면 흐뭇하게 미소 짓게 된다.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면서. 묘한 기분이 된다.

가마쿠라 역 앞은 꽤 ‘시내’다웠다. 맥도날드도 있고 스타벅스도 있고. 역에 내렸을 때 나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역의 자판기에서 생수를 뽑아 벌컥벌컥 마시면서 사람들이 가는 대로 각다귀처럼 흔들흔들 걸어 다녔다.

가마쿠라 오나리마치 여행오나리마치(御成町)의 거리에는 유럽을 연상케 하는 보도블록이 깔려있고, 차가 다니지 않는 이 골목 양옆에는 아기자기한 빈티지 소품 카페와 옷 가게, 달달한 냄새가 나는 디저트 가게와 분위기 있는 조그만 카페들이 자리하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이나 그 옆 동문 시장길처럼 단지 걸으며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가로등에 점 등이 되면 더 운치 있는 거리가 될 것 같았지만 밤이 되기 전에 도쿄에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사춘기

알 수 없는 표정의 액자

“웃으라고.”
“싫어!”
“웃으라고오!”
“싫어어어!!”

바스락

평화로운 맑은 날의 가마쿠라예전에 좋아하던 어떤 노래를 틀었다. 언제 들어도 좋은 목소리는 흔치 않다. 그 목소리는 아무 잘못이 없지만 내 마음이 변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오래도록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불가사의한 행운인가! 그것은 사람의 매일을 무척이나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마음이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모습을 바꾸고, 아무리 애써도 그전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그 행운을 손에 쥐고 있을 동안은 그것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한적한 가마쿠라좋아하는 마음을 잃어버렸을 때 그다음의 것이 언제 찾아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필요도 없다. 영원히 좋아할 노래도 없지만 반대로 영원히 싫어할 노래도 없는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내가 지금 무슨 노래를 듣고 싶은지도 헷갈리는데!

돌아가는 길

도쿄 메트로 오에도 선에노덴 열차를 타고 가마쿠라 역으로 돌아간 후, JR 가마쿠라 역으로 걸어가서 도쿄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내가 알기로는, 출발역과 동일한 역에서 내려야 한다. 나는 신주쿠역에서 패스를 구입하고 탔으니 신주쿠역으로 우선 돌아와 패스를 반납하고 (개찰구 기계가 알아서 삼켜준다) 다시 티켓을 끊어 도쿄 메트로 오에도 선을 탔다.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약 두 시간 정도가 걸렸다. 비도 맞고 땀도 나서 꼬질꼬질한 몸을 뜨뜻한 물 가득 찬 욕조에 뉘는 것으로 하루를 마쳤다.

Published by 오지노라상

허비는 행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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